주요 소장 작품

장 프랑수아 밀레
  • 폴린 오노의 초상
    장 프랑수아 밀레 폴린 오노의 초상 1841-42년경 캔버스에 유채73.0×63.0cm

    1837년에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에서 공부하던 젊은 밀레는 몇 번 고향 쉘부르로 돌아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이 작품은 밀레 초기의 초상화로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쉘부르의 재봉사의 딸인 폴린 비르지니 오노이다. 화려한 모습으로 표현된 그녀는 밀레의 첫 아내였던 여성이다. 두 사람은 1841년에 결혼했지만 3년 후 몸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던 폴린이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때 밀레는 29세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 다프니스와 클로에
    장 프랑수아 밀레 다프니스와 클로에 1845년경 캔버스에 유채82.5×65.0cm

    농민화로 유명한 밀레지만 그는 소설에 바탕을 둔 작품도 그렸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롱고스가 지은 목가적인 연애소설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소년 다프니스와 소녀 클로에는 갓난아기 때 에게 해에 떠 있는 레스보스 섬에 버려졌으나 마음씨 고운 양치기들이 키워주었다. 그 후 커가면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연인이 된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은 어린아이로 표현되어 있다. 다프니스는 숲 속에서 피리를 불고 있고, 클로에는 그에게 기대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 잠이 든 바느질 하는 여인
    장 프랑수아 밀레 잠이 든 바느질 하는 여인 1844-45년 캔버스에 유채45.7×38.1cm

    밀레는 1845년 쉘부르에서 가정부를 하던 카트린느 르메르(1827-1894)와 만나 함께 살게 된다. 이후 30년 동안 카트린느는 밀레의 좋은 반려자가 되어 9명의 자녀를 키웠다. 이 작품의 모델은 카트린느로 보인다. 이 무렵 밀레는 나부나 사랑스러운 여성을 표현한 소품을 많이 그렸다. '바느질 하는 여인'이라는 주제는 밀레가 만년까지 즐겨 그렸던 테마 중의 하나이다. 바느질하다 잠이 든 여성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골무나 배경에 놓인 정물 등 세밀한 부분까지 표현되어 있다.

  • 씨 뿌리는 사람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캔버스에 유채99.7×80.0cm

    이 작품은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 마을로 이주한 밀레가 처음 그린 대작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주제는 파리에 살았던 무렵부터 밀레의 흥미를 끌었다.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왼손으로 씨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면서 오른손으로 씨를 뿌리는 농민의 당당한 모습이다. 그러나 밀레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익숙하게 보아오던 농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이 작품이 파리의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농민의 힘찬 모습을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보수적인 사람들은 이 그림의 씨 뿌리는 사람을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 이삭 줍는 여인들, 여름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여름 1853년 캔버스에 유채38.3×29.3cm

    밀레는 생애에 3번 사계절 연작을 그렸는데, 《이삭 줍는 여인들, 여름》은 첫 연작의 '여름'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는 밀 등 곡물의 수확이 7월에서 8월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수확한 곡물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밭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삭을 땅에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바르비종으로 이주한 밀레는 성서에 등장하는 이삭 줍는 광경을 보고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수확한 곡물을 산처럼 쌓아 놓은 풍경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지만 밀레는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가난한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 닭 모이를 주는 여인
    장 프랑수아 밀레 닭 모이를 주는 여인 1853-56년 목판에 유채73.0×53.5cm

    이 작품은 농가 부부의 일상생활을 그리고 있다. 튼튼해 보이는 돌로 만든 집의 문 앞에서 여인이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다. 모이는 주머니 모양으로 접은 앞치마 안에 들어 있다. 그녀의 오른손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모이를 먹으려고 닭이 모여 있다. 닭도 각각 개성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먼 곳에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닭도 있고, 모이 주는 것도 모른 채 태평스러운 닭도 있다. 이곳은 농가의 뒤뜰이다. 벽에는 농기구가 세워져 있다. 울타리 너머로 정원을 손질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커다란 정원의 나무에 무성하게 자란 잎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 원죄 없으신 성모
    장 프랑수아 밀레 원죄 없으신 성모 1858년 캔버스에 유채79.0×45.0cm

    1857년 4월 로마 철도청은 밀레에게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가 사용하는 열차의 예배실을 장식할 성모 마리아상의 제작을 의뢰했다. 주어진 시간은 불과 2개월 정도였지만 밀레는 기한 내에 완성했다. 로마교황청이 부탁한 주제는 '원죄 없으신 성모'였다. '원죄 없으신 성모' 또는 '원죄 없으신 잉태'는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잉태했으니 성모 마리아도 원죄를 범하지 않은 삶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마리아상을 원한 교황의 기대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 해질 무렵 양떼를 데리고 돌아가는 양치기
    장 프랑수아 밀레, 해질 무렵 양떼를 데리고 돌아가는 양치기 1857-60년 목판에 유채53.5×71.0cm

    밀레는 1850년대에서 1860년대에 걸쳐 '해질 무렵 양떼를 데리고 돌아가는 양치기'라는 주제를 자주 다뤘다. 모자를 쓴 양치기는 추위를 견디려는 듯 두툼한 망토의 옷깃을 여미고 있다. 얌전한 양떼는 한 덩어리가 되어 양치기를 따르고 있다. 양치기 개를 데리고 양을 방목하는 양치기는 지팡이를 들고 망토를 걸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양치기는 농민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지만 성서 속에서는 '성스러운 현자'로 그려진다.모르는 것이 없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져 여행자가 길을 묻는 경우도 있었다.

  • 낡은 돌담
    장 프랑수아 밀레 낡은 돌담 1862년 캔버스에 유채50.8×61.6cm

    밀레가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1862년경의 작품이다. 바르비종 마을과 퐁텐블로 숲을 가르는 오래된 낡은 돌담과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사슴이 그려져 있다. 돌담 안쪽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지고, 야생 사슴이 이쪽의 모습을 엿보고 있다. 앞쪽 평지에는 밝은 햇빛이 비쳐서 민들레와 개구리의 생기가 넘치는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겨울(얼어붙은 큐피드)
    장 프랑수아 밀레 겨울(얼어붙은 큐피드) 1864-65년 캔버스에 유채205.0×112.0cm

    밀레가 그린 2번째 사계절 연작 중 '겨울'에 해당하며, 파리에 신축하는 은행가 토마의 저택 안 식당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봄은 《다프니스와 클로에》(국립서양미술관 소장), 여름은 농업의 여신 《케레스》(보르도미술관 소장), 가을은 천장화(화재로 소실)이다. 변형 캔버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식당 난로 위에 장식할 목적 때문이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나크레온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추위에 떨며 눈 속을 걸어 온 큐피드가 따뜻한 집 안에서 나온 여인과 노인의 도움을 받는 장면이다.

  • 그레빌의 절벽
    장 프랑수아 밀레, 그레빌의 절벽 1870년 캔버스에 유채24.0×33.0cm

    1870년 7월 프랑스와 프로이센(현재 독일)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이 보불전쟁의 전화를 피하고자 같은 해 8월에 가족과 함께 바르비종을 떠난 밀레는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쉘부르로 가서 반년 정도 머문다. 이 작품은 그 당시 그린 것이다. 그레빌은 쉘부르와 가까운 곳에 있는 바닷가 마을로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것은 영불해협이다. 친구인 전기작가 알프레드 상시에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9월에서 10월 사이에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미술
  • 벌목하는 사람들
    클로드 로랭 벌목하는 사람들 1637년 캔버스에 유채79.4×115.6cm

    프랑스 출신의 클로드 로랭(본명은 클로드 줄레이다. 로렌 지역 출신이라 '로랭'이라 불린다.) 은 1627년 2번째로 로마에 간 이후로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로마에서 생애를 마쳤다. 클로드의 관심은 공기원근법적인 효과가 풍부한 풍경 묘사이며, 특히 아침과 저녁의 황금색 태양을 배경으로 한 항구 풍경으로 정평이 나 있다.
    클로드가 그리는 풍경은 연극 무대와 비슷한 것으로 현실과 다른 이상적인 세계를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는 사람들이 벌채한 나무를 배로 옮겨 싣는데 해질 무렵 다소 쓸쓸한 정경이 표현되어 있다.
    클로드는 "진실의 책"이라는 소묘집을 남겼는데, 이는 자신의 유화를 본뜬 소묘를 모은 작품집이다. 이 작품에 대응하는 "진실의 책" 21번 소묘에는 '나폴리'라고 쓰여 있다. 이 작품은 농민의 노동을 주제로 한 5점으로 이루어진 풍경화 연작의 하나이며 디트로이트에 소장된 《양치기가 있는 풍경》과 한 쌍을 이룬다.

  • 벤트하임성이 보이는 풍경
    야콥 반 루이스달 벤트하임성이 보이는 풍경 1655년경 캔버스에 유채63.5×68.0cm

    하를럼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떻게 미술을 배웠는지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1648년 하를럼 화가조합에 가입하여 직업화가로 인정받았다. 1650년경 독일 서부로 여행을 떠나 산악 풍경, 거대한 숲, 강, 언덕, 성 등에 감동받아 이후의 작품에 반영한다.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풍경화가이며, 바르비종파를 비롯한 후세의 풍경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을 방문한 지 대략 5년 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네덜란드 국경 근처의 베스트팔렌 지방의 작은 마을 벤트하임에 있는 성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이 성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인지 자주 모티브로 삼았다. 왼쪽 배경에 무성한 나무 사이로 약간 보이는 건물이 성의 작은 탑이다. 성의 주요 건물은 숨겨져 있으며 이 작품에서는 기복이 많은 언덕의 경사면이나 성으로 이어지는 숲길의 모습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에는 말을 탄 기사, 남녀 농민, 양치기와 양의 무리가 있다.

  • 인버레이성이 보이는 파인만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인버레이성이 보이는 파인만 1802-1805년 종이에 수채56.0×83.0cm

    런던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사망했다. 1789년 로열 아카데미의 미술학교에 입학, 1790년 동 아카데미의 전람회에 수채화를 첫 출품, 1802년에는 정회원이 된다. 젊은 시절부터 각지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으며, 1828년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부터 1840년경까지 제작한 풍경화에서는 공기나 빛의 형태를 그리려 노력했다.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이며,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은 1801년 여름에 스코틀랜드를 방문했을 때 제작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인버레이성을 소유한 아가일 공작의 주문에 따라 제작한 작품이다. 파인만은 글래스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60킬로 떨어진 곳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이 파인만으로 튀어나온 곶 위에 인버레이성이 보이는 경치를 터너는 많은 연필소묘와 수채화로 남겼다. 이 작품에서는 다소 거친 파도로 인한 높은 수면에 배가 떠 있고 흰 새가 그 옆을 날고 있다.

  • 숲 속-여름 아침
    쥘 뒤프레 숲 속-여름 아침 1840년경 캔버스에 유채 95.5×76.0cm

    프랑스 낭트의 도자기공장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의 릴 아담에서 사망했다. 1822년부터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에 종사했지만 12세 무렵부터 유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1831년 살롱(관전)에 처음 입선한다. 1834년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 풍경화의 영향을 받는다. 귀국 후에는 주로 파리 근교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루소와 친분이 두터워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받았다. 1850년 릴 아담으로 이주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지냈다.
    1840년대의 뒤프레는 바르비종이나 여행지에서 친구 루소와 함께 작품을 제작했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이 작품에는 화면 가득 키가 큰 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가지나 잎이 서로 얽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창공에는 푸른 여름 하늘이 펼쳐지고, 나무 아래의 목초지에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 있다. 소들도 시원한 그늘을 골라 편안하게 쉬고 있을 것이리라. 원경을 보면 소의 무리는 아주 먼 곳에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장 서는 날
    콩스탕 트루아용 장 서는 날 1859년경 캔버스에 유채115.4×175.5cm

    세브르에서 도자기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했다. 일찍부터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에게 그림을 배웠다. 1843년 루소와 알게 되면서 퐁텐블로 숲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1847년 네덜란드에서 1년간 체재하고 17, 18세기의 네덜란드 화가의 작품과 만난 후 동물화를 그리게 된다. 184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사후인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대형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주제인 정기 시장은 동물을 사고 팔고, 멀리 떨어진 도시의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대부분의 프랑스 지방에서는 봄이나 가을에 중세 이후 같은 장소에서 시장이 열렸다. 이 작품에서는 동물화가로 유명한 트루아용에 걸맞게 시장에 모인 가축의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가와사키 조선소 초대 사장으로 미술수집가였던 마쓰카타 고지로(松方幸次郎)가 유럽 방문 중에 구입하여 일본에 가지고 온 작품으로 1928년 일본에서 공개되었다.

  • 퐁텐블로 숲 외곽
    피에르 에티엔느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 외곽 1866년 캔버스에 유채76.0×95.0cm

    파리에서 태어나 바르비종에서 사망했다.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와 영국 풍경화 등의 영향을 받았다. 1833년에 바르비종을 방문하고, 1836년에는 바르비종에 정착한다. 많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파리를 거점으로 활약했으나 루소는 바르비종 마을에 살면서 풍경화를 꾸준히 그렸다.
    1831년 살롱(관전)에 처음 입선했지만 1836년부터 1841년까지 살롱(관전)에 계속 떨어졌기 때문에 '위대한 낙선왕'으로 불렸다. 그 후 1849년 살롱에서 1등상 수상, 1852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특별실에 작품이 전시되는 등 공식적인 평가를 얻었다. 바르비종파의 지도자적인 존재이며 밀레나 디아스와 친밀하게 지냈다.
    이 작품은 퐁텐블로 숲의 아프르몽 계곡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바위 계곡 꼭대기에 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마실 물도 있는 곳이라 방목지로 인기가 있었다. 루소는 1830년대에 처음 바르비종을 찾은 이후, 아프르몽 계곡의 경치를 많이 그렸다.

  • 대농원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대농원 1860-1865년경 캔버스에 유채55.2×80.8cm

    파리의 부유한 포목상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했다. 가족의 반대로 인해 그림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은 26세가 되었을 때였다. 고전주의 풍경화가 미샬롱과 베르탱에게 배우고, 1827년에 살롱(관전)에 처음 입선했다. 3차례의 이탈리아 여행 외에 퐁텐블로 숲을 비롯하여 프랑스 각지를 여행하면서 작품을 제작했다. 1850년경부터는 은회색을 기조로 한 시정적인 작품을 그려 인기를 얻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대상을 받아 명실공히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1850년 이후의 코로 작품을 특징짓는 은회색을 사용한 시정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묘사된 것은 코로가 자주 찾았던 파리 서쪽 교외의 작은 마을인 아브레 마을의 풍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파리에서 잃어버린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전경에는 여성들이 4명 모두 시골풍의 옷차림을 하고 있으며, 의복에 사용된 밝은 색-흰색, 황색, 적색, 청색-은 앞쪽의 땅 위에도 칠해져 녹색 풀밭을 물들이고 있다.

  • 개울가의 사슴
    귀스타브 쿠르베 개울가의 사슴 1864년경 캔버스에 유채73.0×92.0cm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 지방의 오르낭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아카데미 슈이스에서 배웠으며, 1844년 살롱(관전)에 처음 입선했다. 《오르낭의 매장》, 《돌 깨는 사람들》 등의 야심작을 차례로 발표한다. 1855년 만국박람회 미술전에서 주요 작품의 출품이 거부되어 스스로 개인전을 열었다. 1871년 파리 코뮌에 참여했으나 코뮌이 패배한 후 투옥되었으며 이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불우하게 지내다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쿠르베는 1857년의 살롱(관전)에 처음 수렵화를 출품한 이후 수렵화가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에는 사냥꾼에게 쫓겨 숨을 곳을 잃고 개울로 뛰어들기 직전의 궁지에 몰린 사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두운 숲 속에서 튀어나온 사슴에게는 한순간 강한 빛이 닿아 목덜미와 등이 빛나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사슴은 영국의 동물화가 에드윈 랜시어 경이 그린 사슴의 모습과 매우 닮아 영향 관계가 지적되고 있다.

  • 우아즈 강변의 여름 아침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우아즈 강변의 여름 아침 1869년 캔버스에 유채 68.6×100.3cm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화가였던 아버지에게 그림의 기초를 배우고 1838년 들라로슈의 아틀리에로 들어가 같은 해 살롱(관전)에 처음 입선한다. 1836년의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으로 각지를 여행하면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1843년 이후 바르비종을 자주 찾았다. 강변의 풍경을 좋아하여 그림의 소재로 삼았던 그는 아틀리에를 갖춘 작은 배 '보틴(Botin)호'를 만들어 프랑스 각지의 강에 띄우고 그림을 그렸다. 1860년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했다. 야외 제작을 중시하는 태도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다.
    이 작품에는 우아즈 강변 풍경이 묘사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작은 증기선이 떠 있다. 증기기관은 19세기에 발달한 동력으로 일견 조용하고 한가로운 풍경 속에도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 건너편에는 집이 줄지어 서 있고,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빨래하는 2명의 여인이 있다. 그녀들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일하고 있지만, 빨래터는 여성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사교 장소이기도 했다.

  • 도르드레흐트의 달빛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도르드레흐트의 달빛 1872년경 캔버스에 유채59.5×102.0cm

    네덜란드 라트로프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생 안드레에서 생을 마감했다. 네덜란드의 헤이그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1846년에 파리로 와서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교류한다.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유화뿐만 아니라 판화로도 각지의 풍경을 그렸다. 1862년에는 부식동판화협회 회원이 되어 뛰어난 에칭 작품을 발표했다. 일찍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각지를 전전하다가 그르노블에 있는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의 무대인 네덜란드의 남홀랜드주의 마을 도르드레흐트에는 강이나 운하가 많다. 이 작품에서도 화면의 중앙을 강(또는 운하)이 차지하고 있으며 여러 척의 배가 떠 있다. 양쪽 강가에는 울창한 나무가 있고, 멀리 풍차와 교회가 보인다. 두터운 구름 사이로 숨는 달이 물을 비춰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대담한 붓 놀림이나 빛과 그림자의 표현은 클로드 모네 등 인상파로 불리게 되는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본 근현대미술
  • 부채를 든 미인도(美人招涼図)
    노구치 쇼힌(野口小蘋) 부채를 든 미인도(美人招涼図) 1887년 비단에 채색125.0×43.0cm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세에 문인화가인 히네 타이잔(日根対山)의 문하로 들어가 쇼힌을 호로 삼았다. 사가현에서 주조업을 경영하는 노구치 가문의 일원과 결혼한 후 한때 영업소가 있는 고후에서 살았다. 후에 가족 모두 도쿄로 이주하여 각종 전람회에 출품, 수상을 거듭하면서 1904년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황실기예원으로 임명되었다. 다이쇼 천황의 즉위식 대전에 헌상할 병풍을 그릴 것을 명받기도 했다.
    이 작품은 붉은색 책상 위에 책이 쌓여 있는 것을 미루어 보아 책을 읽고 일어선 여성을 그리고 있다. 부채는 손이나 입고 있는 옷이 비쳐 보이는 물부채이고 기모노는 속옷이 비치는 조릿대 무늬의 성기고 얇게 짠 비단으로 시원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뺨은 살짝 붉게 물들인 갸름한 얼굴 모양은 마치 모델을 보고 그린 듯한 개성적인 표정이라 자화상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선명한 청록산수화나 기품 있는 화조도를 많이 그렸던 쇼힌이었지만 장년기에는 미인화에 예사롭지 않은 기량을 발휘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대표작이다.

  • 신성한 여름 후지산(夏之霊峰)
    요코야마 다이칸(横山大観) 신성한 여름 후지산(夏之霊峰) 1941년경 비단에 채색 53.5×65.8cm

    미토에서 태어났다. 1889년에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의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의 지도를 받았다. 1898년에는 오카쿠라 덴신과 함께 재야의 미술 단체인 일본미술원을 창립하고, 전통적인 일본화의 윤곽선을 없앤 "몽롱체"를 창작했다. 근대 일본화의 개혁 운동을 추진하여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은 후지 산의 사계절을 그린 연작 중 하나이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후지 산의 정상은 선명한 청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눈이 약간 남아 있다. 구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복잡하게 모습을 바꾸는 한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다이칸은 '후지 산은 운연에 둘러싸인 모습이 최고'라고 말하며, 종종 여름 후지 산을 이 그림과 같이 구름 위로 보이는 감청색의 산 형태로 표현했다. 후지 산은 다이칸이 사랑했던 그림 소재 중 하나였으며, 후지 산을 그리는 것은 자신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후지 산을 일본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성의 형상화로 묘사했다. 생애를 통해 약 1,500점이나 되는 후지 산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 우기(雨期)
    곤도 고이치로(近藤浩一路) 우기(雨期) 1951년 종이에 먹 54.4×61.0cm

    야마나시현 무츠아이무라(현 난부초)에서 태어났다. 도쿄로 올라와 와다 에이사쿠(和田英作)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졸업 후 만화기자로 인기를 누리는 한편 일본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산고카이(珊瑚會)에 출품했다. 1919년 제6회 일본미술원 전람회에 처음으로 입선하였고, 제10회 출품작 《가마우지 낚시 6제(鵜飼六題)》, 이듬해 11회 출품작 《경락10제(京洛十題)》는 수묵화가로서의 지위를 굳히는 대표작이 되었다. 이후 일본 각지를 여행하며 명승지의 풍경을 꾸준히 그렸다. 1936년의 일본미술원 전람회 탈퇴 후에는 웅대한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 모습, 과일이나 작은 동물 등을 마음 가는 대로 제작했다.
    이 작품은 잔뜩 찌푸려 희뿌연 비구름 아래 농촌 여인 3명이 묵묵히 모를 심고 있는 정경을 그렸다. 그렇게 크지 않은 화면이지만 농촌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을 준다. 고이치로가 중국에서 들여온 고급 화구와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여 새로운 수묵화를 꾸준히 선보인 원숙기의 명작이다.

  • Sekishun (Late Spring)
    모치즈키 슌코(望月春江) 아쉬운 봄(惜春) 1978년 종이에 채색 180.0×252.0cm

    니시야마나시군 스미요시무라(현 고후시)에서 태어났다.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 일본화과에서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의 지도를 받았다. 1928년 제9회 제국미술원 전람회와 이듬해 제10회 전람회에서 특선을 연속 수상하여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이후 문부성 미술 전람회, 일본 미술 전람회 심사원을 역임하였으며 일본예술원상을 수상했다. 한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현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했다. 야마나시미술협회를 결성하는 등 많은 공헌을 하여 1975년에 야마나시현 특별문화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이 작품은 커다란 화폭 가득한 금박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꽃을 활짝 피운 겹벚꽃을 그렸다. 이 벚꽃에는 다양한 시간이 함께 하고 있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와 지금이 절정인 꽃. 한쪽은 절정이지만 떨어지는 꽃이 2송이만 그려진 부분도 놓쳐서는 안 된다. 화조화에 일가견이 있었던 슌코는 평소에 스케치를 게을리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상과 마주 보았다. 작품의 분위기는 전통적인 야마토에(일본의 사물이나 풍속을 그린 그림)이며 그 중에서도 먹, 극채색, 그리고 금박에 무게를 둔 모모야마 장벽화의 웅장함과 린파(琳派, 에도시대의 회화의 유파)의 장식미에 심취했다.

  • 유럽의 위기
    요네쿠라 히사히토(米倉壽仁) 유럽의 위기 1936년 캔버스에 유채 80.3×100.0cm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태어났다. 1935년 제5회 독립미술협회전에 처음 입선하였고, 다음 해 도쿄로 왔다. 1939년에는 미술문화협회 발족에 참가했다. 전후인 1951년에 이 협회를 탈퇴하고 이듬해 창립회원 9명으로 살롱 드 쥬완을 결성한 이후 계속 동회에 출품했다.
    이 작품은 긴자 키노쿠니야 화랑에서 개최한 개인전 출품작이다. 개인전에 앞서 요네쿠라는 잡지에 '세계의 위기'라는 시를 기고했는데, 같은 해 7월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을 연상시키는 내용이었다. 유럽의 옛 지도와 금이 간 두개골의 이미지가 겹쳐져 벌어진 틈 사이로 부서진 기계의 부품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다. 말은 나팔을 쥔 손과 함께 전쟁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화면 왼쪽 깊숙한 곳에는 움직임이 봉쇄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서양 물질문명의 붕괴와 제2차 세계대전을 예견한 듯 느껴지는 이 작품은 요네쿠라의 전쟁 전의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며, 일본 초현실주의 회화의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서브웨이 No.8
    사토 마사키(佐藤正明) 서브웨이 No.8 1975년 캔버스에 아크릴 110.0×135.0cm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태어났다. 197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 부속 미술학교에서 1974년까지 공부했다. 1975년부터 '서브웨이' 시리즈를 시작했고, 그 후 '뉴스 스탠드' 시리즈로 스타일이 바뀌었지만 일관되게 인종, 언어 등 뉴욕을 상징하는 주제에 천착했다.
    이주 초기 사토는 지하철을 탈 때 터무니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는 글을 남겼다. 1970년대부터 인체나 버스, 택시 등에 원뿔을 그리게 되었는데, '서브웨이' 시리즈에서는 원뿔을 지하철과 역 구내와 같은 공간으로 퍼져서, 대도시라는 생명체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에서는 통로의 상하좌우가 무수히 많은 구멍으로 덮여 있어, 감상자가 제대로 설 수도 없을 듯한 감각을 일으켜서 사토가 느낀 불안감을 공유하게 된다. 화면 안쪽의 시계 옆에는 광고도 그려져 있는데, 이렇게 문자를 그려 넣은 묘사 방식이 '뉴스 스탠드' 시리즈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 2대 나카무라 간지로, 가미야 지헤이(신판 무대 그림)(二世中村鴈治郎、紙屋治兵衛(新版舞台之姿絵))
    나토리 슌센(名取春仙) 2대 나카무라 간지로, 가미야 지헤이(신판 무대 그림)(二世中村鴈治郎、紙屋治兵衛(新版舞台之姿絵)) 1951년~1954년 목판 39.0×27.0cm

    야마나시현 구시가타마치(현 미나미알프스시)에서 태어났다.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 일본화과를 중퇴했다. 일본미술원 전람회 등에 출품하면서 아사히신문사에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산시로" 등 신문소설의 삽화를 많이 그렸다. 1916년 가호도(画報堂) 주최의 '극화전람회'전에 출품한 《초대 나카무라 간지로, 가미야 지헤이(初世中村鴈治郎 紙屋治兵衛図)》가 같은 해 와타나메 판화전에 목판화로 출판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배우 그림 판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쇼와시대(일본의 연호, 1926~1989)의 배우 그림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2대 나카무라 간지로는 전통 가부키 보존회 회원의 제1차 인증을 받은 명배우이다. 가미야 지헤이는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 작품의 전통 인형극 "텐노아미지마의 동반 자살"의 주인공이다. 처자식이 있지만 유곽의 여자 고하루(小春)와 사랑에 빠져 결국 동반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해 수건을 머리에 쓴 모습으로 잘못된 사랑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는 지헤이. 그 표정과 눈가와 입가의 화장이 어우러져서 독특한 성적 매력이 느껴지는 분위기 있는 작품이다.

  • 돌꽃(적색)
    하기와라 히데오(萩原英雄) 돌꽃(적색) 1960년 목판화 87.0×58.0cm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태어났다. 1938년에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 유화과를 졸업했다. 1953년부터 폐결핵 때문에 3년간 요양 생활을 했는데 이 무렵부터 독학으로 판화 제작을 시작한다. 1960년 도쿄국제판화 비엔날레에 출품하여 가나가와 현립 근대미술관 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는 스위스 루가노 국제판화 비엔날레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그 후에도 수많은 국제전에서 수상을 거듭했다. 목판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한 결과 새로운 기법도 다수 선보였다.
    이 작품은 제2회 도쿄국제판화 비엔날레 수상작이다. 하기와라가 개발한 양면 찍기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종이 뒷면에 찍은 짙은 감색이 표면으로 스며 나와 가느다란 검은 선이 화면 전체로 퍼져가는 동시에 붉은 색조도 더욱 깊이 있게 표현되었다. 하기와라는 목판화를 제작할 때 유화처럼 색의 층과 화면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실과 현상을 독자적인 이미지로 다시 포착하여 깊은 색채의 목판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 얼어붙은 회랑(베링 해협)
    후카자와 유키오(深沢幸雄) 얼어붙은 회랑(베링 해협) 1978년 동판화 49.5×74.5cm

    야마나시현 미나미코마군 마스호초(현 후지카와초)에서 태어났다. 1949년 도쿄미술학교 금속공예과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동판화를 익혔다. 1957년 일본판화협회전에서 일본판화협회상을 수상했다. 1963년 멕시코 국제문화진흥회의 의뢰를 받아 멕시코로 건너가 동판화 기법을 가르쳤으며, 이후 색채판화를 다수 제작하게 되었다. 1972년 피렌체 국제판화 비엔날레에서 반코 데 로마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후카자와는 70년대 중반의 중미를 여행하던 중 인디오 마을을 찾았는데, 인디오와 아시아인은 몽골 인종이라는 공통 조상의 후예라는 생각을 깊게 하여 <신대륙의 몽골로이드>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이 작품은 그 대표작으로 빙하기에 얼어붙은 베링 해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신대륙으로 이동한 몽골 인종을 표현하고 있다. 1970년대를 통해 장대한 인류사를 주제로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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